자본주의 리얼리즘 / 마크 피셔

 

 

마크 피셔 책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먼저 읽게 될 줄 알았는데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초중반부는 재밌게 읽었는데 후반부는 내 이해력의 부족인지 번역자의 한계인지 이게 무슨 소리요.. 싶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무엇이었는가도 까먹어버리고 말았고 지루했음 ㅠㅠ

 

 


 

 

새로운 것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에 응답하면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동시에 확립된 것은 새로운 것에 답하며 자신을 재형성해야 한다. 엘리엇의 주장은 미래를 고갈시키게 되면 우리에게는 과거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통이 더 이상 논쟁되거나 변경되지 않을 때 그 전통은 아무 쓸모도 없어진다. 그저 보존되어 있기만 한 문화는 결코 문화가 아니다. 영화 속 「게르니카」의 운명이 그 본보기인데, 한때 파시스트의 잔혹성에 맞서는 고뇌와 분노의 울부짖음이었던 이 그림은 이제 벽에 걸린 장식품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서 「게르니카」가 ‘우상’의 지위를 얻는 것은 그림을 보관하고 있는 배터시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기능과 맥락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적 대상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그 힘을 유지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정교한 의례나 상징 수준에서 믿음이 무너진 뒤 남겨진 무엇이다. 이제는 그 폐허와 유물 사이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소비자-구경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믿음에서 미학으로의 전환, 참여에서 구경으로의 이 전환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미덕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알랭 바디우가 언급하듯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이 만들어 낸 ‘치명적 추상들’로부터 우리를 구해 낸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믿음 자체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방패로 제시한다.4 포스트모던 자본주의 고유의 태도인 아이러니한 거리 두기는 우리를 광신주의의 유혹에서 면역시켜 준다고 가정된다. 사람들은 기대치를 낮추는 적은 비용으로 테러와 전체주의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바디우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야만적이고 극도로 불평등한 상황, 모든 존재가 오직 돈으로 평가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미 확립된 질서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해도 진정으로 이 질서가 이상적이라거나 멋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나머지 모든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완벽히 좋은 상황에서 살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완전히 나쁜 상황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피로 얼룩진 독재보다는 낫다고, 자본주의는 부당하지만 스탈린주의 같은 범죄는 아니라고, 우리는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에이즈로 죽도록 방치하지만 밀로셰비치처럼 인종주의적인 민족주의를 선포하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비행기로 이라크인을 살해하지만 그들이 르완다에서 하듯 마체테로 사람 목을 베지는 않는다고 말이죠.

 

 

 

‘대안적’ 또는 ‘독립적’ 문화 지대들이 자리 잡고 확립되어 있는 곳을 보라. 그곳에서는 반항과 논쟁의 오랜 몸짓들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된다. ‘대안적’ 또는 ‘독립적’이라는 표현은 주류 문화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류 내부의 스타일, 사실상 바로 그 지배적인 스타일이다. 어느 누구도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보다 훌륭하게 이 교착 상태를 형상화하지 (그리고 그것과 투쟁하지) 못했다. 코베인은 지독한 권태와 대상 없는 분노를 느끼며 나른한 목소리로 역사 이후에 도달한 세대의 낙담을 노래하는 듯 보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심지어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예측되고 추적되며 사고팔렸다. 코베인은 자신이 그저 또 하나의 구경거리일 뿐임을, MTV에 대한 항의보다 MTV에 더 좋은 일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사전에 각본이 짜인 클리셰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마저도 클리셰라는 것을 알았다. 코베인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곤경은 제임슨이 묘사했던 곤경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코베인은 포스트모던 문화 일반과 마찬가지로 “스타일의 혁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죽은 스타일들을 모방하고 가면을 쓴 채 상상의 박물관에나 있을 스타일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만이 남은 세계”에 자신이 속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11 이러한 세계에서는 성공마저도 실패를 의미하는데, 성공한다는 것은 체계가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고깃덩어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바나와 코베인의 고도로 실존적인 고뇌는 이미 옛 국면에 속한다. 이들의 뒤를 이은 것은 아무런 불안 없이 과거의 형식들을 재생산하는 혼성 모방-록이다.

 

 

 

따지고 보면 힙합이 둘째 의미의 리얼로, 즉 후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안정성이라는 현실로 손쉽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첫째 의미의 리얼, 즉 ‘비타협적인 것’을 보여 준 힙합의 실천 때문이다. 후기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런 진정성은 시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갱스터랩은 수많은 옹호자가 주장하듯이 그저 기존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단순히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힙합과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적 장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스스로를 일종의 반신화적 신화로 변형시키는 방식 중의 하나다. 「스카페이스」, 「대부」 시리즈, 「저수지의 개들」, 「좋은 친구들」, 「펄프 픽션」 같은 갱스터 영화와 힙합의 친연성은 세계에 대한 감상적인 환영을 제거하고 세계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 가령 홉스적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 영구적 착취와 일반화된 범죄의 체계 등으로 본다는 그들 공통의 주장에서 비롯한다. 레이놀즈는 힙합에 있어 “‘리얼해지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어떤 자연상태,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며 우리 대부분은 패자가 되기 마련인 그런 자연상태와 대면하는 것”이라 쓰고 있다.

 

 

 

「월-E」 같은 영화는 로베르트 팔러가 말한 ‘상호 수동성’의 전형적인 사례다.1 이 영화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반자본주의를 상연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소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선전propaganda과 달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않으며, 자본의 작동이 어떤 주관적인 믿음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선전 없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를 떠올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그것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 더 잘 굴러갈 수 있다.

 

 

 

오히려 프로덕트레드가 보여 준 ‘펑크록’이나 ‘힙합’적인 특징이란 자본주의가 도시의 유일한 게임임을 ‘현실주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프로덕트레드의 목표는 그저 이 특수한 거래로 발생한 수익금 일부가 훌륭한 명분에 쓰인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환상은 서구의 소비주의가 지구 전체의 체계적 불평등에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기는커녕 그 자체로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담겨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공정 제품들을 사는 것이 전부다.

 

 

 

자본주의가 고통을 안기는 방식을 강조하는 도덕적 비판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할 뿐이다. 빈곤·기아·전쟁 등이 현실의 불가피한 일부로 제시되는 한 이런 고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쉽게 순진한 유토피아주의로 치부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일관적이고 방어될 수 없음을 보여 줄 때만,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에 리얼리즘 같은 것은 없음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반성적 무기력은 영국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는 무언의 세계관에 다름 아니며 광범위한 병리 현상들과도 연관이 있다. 내가 함께했던 다수의 10대가 정신 건강 문제나 학습 장애를 안고 있었다. 우울증은 이들의 고질병이다. 우울증은 대개 국민건강보험으로 처리되는 질환이며 이로 인해 고통받는 연령대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다양한 양상의 난독증을 지닌 학생 수는 깜짝 놀랄 만큼 많다. 오늘날 영국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10대가 되는 것은 어떤 질병으로 재분류되는 것에 가깝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러한 병리화는 모든 정치화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한다. 정신적 문제들이 개인화됨으로써, 즉 개인 신경계의 화학적 불균형 그리고/또는 가족 배경에 의해 야기되는 것인 양 취급됨으로써 사회 체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어떤 물음도 배제된다.

 

 

 

들뢰즈는 프란츠 카프카가 통제 사회에 전형적인 분산된 사이버네틱 권력의 예언자라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소송』에서 카프카는 피고인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무죄 판결을 중요하게 구별한다. 실질적인 무죄 판결은 한때 가능했다고 해도(“우리는 무죄 판결의 사례를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고대의 재판 사례에서만 볼 수 있지요”) 더 이상은 가능하지 않다. 남아 있는 두 가지 선택지는 첫째, 피고인이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지만 나중의 어느 불특정한 시점에 새로이 기소당할 수 있는 “표면적인 무죄 선고”, 둘째, 두려운 최종 판결이 도래하지 않도록 피고인이 끝없이 계속되는 법률적 공방 과정에 참여하는(이 과정이 무한히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무한한 지연”이다.2 들뢰즈는 카프카, 나아가 푸코와 윌리엄 버로스가 윤곽을 그린 통제 사회가 무한한 지연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령 이제 교육은 평생 동안 이어지는 과정이 되었고, 일하는 삶이 지속되는 한 훈련도 지속된다. 또 사람들은 일거리를 집에 가져오며, 집에서 일하거나 반대로 일에서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권력이 이처럼 ‘무한히 지연되는’ 양식을 취함에 따라 외적인 감시는 내적인 관리policing로 대체된다. 통제는 우리가 그것과 공모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 이로부터 버로스의 ‘통제 중독자’라는 인물상, 즉 통제하는 일에 푹 빠져 있지만 또한 불가피하게 통제에 내맡겨지고 지배당하는 자가 나온다.

 

 

 

학생들에게 두 문장 이상을 읽도록 해 보면 대부분—A 레벨 과정[대학 진학 직전의 2년 과정]의 학생조차도—이 못하겠다고 항의할 것이다. 교사들이 가장 빈번하게 듣는 불평은 따분하다는 것이다. 쟁점은 글의 내용이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따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저 유서 깊은 10대의 귀차니즘torpor이 아니라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문자 문화 이후의 ‘새로운 육체’New Flesh3와 퇴조하고 있는 훈육 체계의 제한과 집중 논리가 이루는 부조화다. 따분하다는 것은 문자메시지, 유튜브, 패스트푸드 등으로 구성된 소통의 감각-자극 매트릭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것, 언제든 달콤한 만족감을 주는 부단한 흐름에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정 지향자들이 68 스타일의 저항 형태를 유지하지만 변화에 대한 반대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한다면,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열정적으로 새로움을 수용한다. 지젝이 올바르게 주장하듯이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는 공식적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바로잡기는커녕 오늘날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이루고 있다. ‘유연성’, ‘노마디즘’, ‘자발성’ 등은 포스트포드주의적 통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경영의 주된 특징이다. 그러나 문제는 유연성과 탈중심화에 대한 어떤 반대도 자기 패배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비유연성과 중심화에 대한 요청이 자극을 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족의 삶이 기대는 가치인 의무·신뢰·헌신 등은 정확히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철 지났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공적 영역이 공격받고 ‘보모 국가’Nanny State1가 제공하던 안전망들이 분해됨에 따라 가족은 항구적인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압력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상황은 정확히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예상했던 그 방식으로 모순에 처해 있다. 즉 자본주의는 가족을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돌보는 본질적인 수단으로, 무정부적인 사회경제 상황이 야기한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책으로)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부모가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만들고, 부부를 서로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그들에게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부과하면서) 가족을 침식해 가는 그 순간에 말이다.

 

 

 

적대는 이제 외적으로 계급 블록 사이의 대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즉 한 명의 노동자로서 옛 스타일의 계급 갈등에 관심이 있지만 또한 연기금에 가입한 자로서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화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는 노동자의 심리학에 위치해 있다. 식별할 수 있는 외부의 적은 더 이상 없다. 결과적으로 포스트포드주의하의 노동자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예의 집’을 떠난 후의 유대인과 비슷해졌다고 마라치는 주장한다. 속박 상태에서 해방되어 그곳으로 되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지만 또한 사막에 버려지고 좌초해 있기에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이상화된 시장은 ‘마찰 없는’ 교환을 산출하기 때문에 거기서 소비자의 욕망은 규제 기관의 개입이나 중재 없이도 직접 충족될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성과를 평가하고 애초에 정량화하기 힘든 노동 형태를 측정하려는 충동은 불가피하게 추가적인 관리 및 관료주의를 요구했다. 이제 노동자들의 성과나 실적은 직접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audit를 통해 가시화되는 성과와 실적의 표상이 평가된다. 불가피하게 어떤 단락短絡이 일어나고, 노동은 그 자체의 공식적인 목표보다는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실제로 영국의 지방정부에 대한 어느 인류학적 연구는 “지방정부의 서비스들을 실제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보다 그 서비스들을 정확하게 표상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눈으로 보는 것에 스스로를 제한하면 우리는 단순히 요점을 놓치게 된다.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les non-dupes errent라는 경구로 이러한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즉 상징적 기만/허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하고 고집스레 자신의 눈을 믿으려는 자들이 가장 먼저 길을 잃는다. ‘오직 자신의 눈만을 믿는’ 냉소주의자는 상징적 허구의 효력을, 이 허구가 우리의 현실 경험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놓치고 만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무매개적으로 현실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생활 다큐나 정치적 여론조사 같은 현상은 언제나 풀 수 없는 딜레마를 부과한다. 카메라의 존재가 촬영되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여론조사 결과의 공표가 투표자들의 미래 행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가? 이런 물음들은 답하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현실’[리얼리티]은 언제나 교묘히 달아나는 것이 된다.

 

 

 

당연하지만 관료주의, 즉 관료 집단의 담론과 대타자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타자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지젝이 드는 두 가지 사례를 보자. 하나는 어떤 홍보 활동에 대한 통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합니다. 저는 아직 이 새로운 조치에 대해 제대로 통지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하급 공무원의 사례다. 다른 하나는 자기 집 주소 번호 때문에 불운을 겪고 있다고 믿는 여성의 사례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명패를 다른 숫자로 바꾸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일은 책임 있는 국가 기관이 적절히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료주의적 리비도, 즉 특정 공무원들이 책임을 부인함으로써 얻는 그 향락에 아주 익숙하다(“제 소관이 아닙니다, 유감입니다, 규정이 그렇습니다”).7 관료들을 대할 때 겪는 좌절감은 종종 그 관료들 스스로도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발된다. 이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이미 (대타자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결정을 언급하는 일뿐이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영구적 불안정성 가운데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관리자는 밝고 건강한 정신의 본보기여서 그의 전 존재가 마음 맞는 친구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친밀감을 발산한다. 그런 쾌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비판적 성찰성을 거의 완전히 결여하고 이 관리자가 그랬듯 관료 기관의 모든 지침에 냉소적으로 순응할 수 있을 때뿐이다. 물론 순응할 때 보이는 그 냉소주의가 핵심이다. 가령 그는 감사 절차를 아주 성실하게 이행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댐으로써 60년대 스타일의 자유주의적 자기 이미지를 보존한다. 이러한 부인은 앞서 논의한 내적인 주관적 태도와 외적인 행동의 구별에 의존한다. 이 관리자는 내적인 주관적 태도상으로는 자신이 감독하고 있는 관료주의적 절차들에 적대적이고 심지어 경멸하지만 외적인 행동 측면에서는 완전히 순응적이다. 노동자들이 무의미하고 비도덕적인 노동을 계속 수행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확히 감사 업무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인 심리적 거리 두기다.

 

 

 

그러나 존스의 주장에 의하면 재활용한다고 가정된 주체는 재활용한다고 가정되지 않은 구조를 전제한다. 즉 재활용을 ‘모두’의 책임으로 만들 때 구조는 자체의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난다. 그 어느 때보다 요란스레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호소하는 지금—주디스 버틀러는 『전쟁의 프레임들』이라는 책에서 이런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 ‘책임화’responsibilization6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오히려 가장 전체적인 차원의 구조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각 개인 모두가 기후 변화에 책임이 있으며 우리가 각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아무도 책임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자본주의에는 확실히 음모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층위의 구조 덕분에 그 음모들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리자 집단이나 은행가 계급을 전반적으로 새로운 일군의 (‘더 선한’) 사람들로 대체하면 사태가 나아지리라고 누구도 진심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악덕 행위가 구조 탓에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구조가 그대로 있는 한 악덕 행위가 재생산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커티스는 인터넷을 공격하는데 그의 관점에서 인터넷은 유아론자들의 공동체, 즉 서로의 가정과 편견에 도전하기보다는 그것들을 확인해 주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의 상호 수동적 네트워크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논쟁이 벌어지는 공적 공간에서 다른 관점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닫힌 회로 속으로 후퇴한다. 그런데 커티스의 주장에 의하면 인터넷의 영향이 옛 미디어에 가한 충격은 재앙에 가깝다. 왜냐하면 옛 미디어의 반동적인 대응은 미디어 종사자들로 하여금 교육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고, 또한 좌파와 우파 양편 모두에 만연한 포퓰리즘 기류에 편승해 온건하고 평이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도록 미디어 생산자들을 ‘협박’하기 때문이다.

 

 

 

좌파의 악습 중 하나는 역사적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 자신이 정말로 믿고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조직하기보다는 크론슈타트 봉기나 신경제정책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의 반자본주의 정치 조직화 형태의 실패가 절망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의 정치를 향한, 패배한 주변성이라는 편리한 입장을 향한 낭만적 애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

 

 

 

+) 이 글이 내 블로그의 300번째 글이네. 와!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