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
책, 영화, 음악
다섯 번째 바퀴, 월간 권태 편집장, INTJ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 책을 읽고 얻은 것은 반전 따위가 아니라...

  1. 2차 대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국이나 영국 못지않게 러시아도 당시에 치열하게 전쟁을 했으며,
  2. 전쟁사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지워졌고,
  3. 남자건 여자건 그 누구도 이 여자들에게 도움 되는 인간은 없었다

....는 사실들이었다. 중간 중간 따뜻한 일화도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봐서는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전쟁 중에는 개무시를, 전쟁 이후에는 외면을 했고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이 여자들을 후려쳤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 일화가 다수였기 때문에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인류애를 잃었다. 사람들이 (심지어 성별에 관계없이!) 어떤 일이건 간에 '여자'가 한 일이라면 일단 같잖게 여기고 본다는 사실이 이 책을 보고 나면 더욱 자명해진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중략)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사을 한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했어.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그때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때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

  - 베라 세르게예브나 로마놉스카야, 빨치산 간호병

 

 

 

  ― 그야 그렇지요...... 아군이 적의 포위망에 갇히자 여자간호병들이 적에게 응사하며 부상자들을 지켰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이해가 됐어요. 부상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두 여자병사가 중립지대로 기어가 '기관단총'으로 누군가를 죽인다, 글쎄, 그건...... 아무래도 '사냥'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군요. 나도 총으로 사람을 죽여봤지만...... 나야 어쨌든 남자니까......

  ― 하지만 그 여자들이 고국을 지킨 건 사실이잖아요? 조국을 구해냈다고요......

  ― 그건 그렇소만...... 그런 여자들이랑 정찰은 같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혼은 하지 않을 거요. 그게, 그래요...... 우리 남자들은 여자를 엄마나 아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요. 결국은 아름다운 숙녀에게 익숙하다는 거요.

 

 

 

  ―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소. 내 아내같이 똑똑한 여자도 여자병사들을 좋게 보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그녀들이 남편감을 찾아 전쟁터에 간 거고, 그곳에서 연애질만 실컷 하다가 왔다고 믿었어요. 이왕 터놓고 애기한 김에 하는 말인데, 실제로 소녀병사들은 대부분 정숙한 처녀들이었어요. 순결한 처녀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더러운 오물도, 들끓는 이도, 시신들도...... 더이상 안 봐도 되자 뭔가 아름다운 게 그리워지더군요. 뭔가 밝고 화사한 그런 게...... 아름다운 여인들...... 친구 한 명이 있었소. 지금 내 기억으로는 꽤 예쁜 아가씨가 그 친구를 사랑했었소. 간호병이었죠. 하지만 친구는 그 아가씨하고 결혼하지 않았어요. 제대하자 다른 여자, 더 예쁜 아가씨를 마나 결혼했지. 하지만 그 친구, 자기 아내랑 행복하지 못해요. 이제야 그 아가씨, 전쟁 때 연인을 떠올리고는 한다오. 서로 좋은 친구가 됐을 텐데. 전선에서 돌아오자 친구는 그 아가씨를 버렸소. 4년 동안 닳아빠진 군화에 남자 솜옷을 입고 다닌 그 아가씨가 지겨웠던 거요. 우리는 전쟁을 잊으려고 애썼소. 그리고 그때 사랑했던 여인들도 힘께 잊은 거요......

 

 

 

  이후에도 나는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진실과 적잖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의식 저 밑으로 쫓아버린 사실 그대로의 진실과 시간의 흔적이 스며든 공통의 진실. 신문 냄새가 폴폴 나는 공통의 진실. 첫번째 진실은 두번째 진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 나는 훈장도 안 달고 다녀. 언젠가 달고 다니던 훈장들을 다 잡아 뜯어버린 후로는 안 달아. 전쟁이 끝나고 빵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는데, 공장장들 회의가 있어 갔다가 무안을 당한 적이 있어. 트러스트 회장이, 자기도 여자면서 나보고 '남자도 아니면서 무슨 훈장은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느냐'고 핀잔을 주더라고. 모두 다 있는 자리에서. 그러는 자기도 노동훈장 받은 걸 자랑스럽게 재킷 위에 달고 다녔거든. 그런데 왠지 전쟁터에서 받은 내 훈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언젠가 회장과 단둘이 사무실에 남게 되자 내가 해군에서 싸운 이야기를 들려줬어. 미안해하더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훈장을 달고 싶은 마음은 싹 사라져버리더라고. 그러고는 지금까지 훈장은 한 번도 달지 않았어. 그렇다고 자부심까지 사라진 건 아닌데도.

 

 

 

  기자가 울더라고...... 그 프랑스인이 꺼이꺼이 우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지. '추다예바 씨, 내 이야기에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우리 프랑스인들에게는 2차대전보다 1차대전이 더 큰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우린 1차대전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죠. 곳곳에 1차대전을 기리는 무덤들과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어요. 하지만 당신들에 대해선 잘 몰라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2차대전이 미국 혼자 히틀러와 싸워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어요. 소련 사람들이 그 승리를 위해 치른 대가,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소련 사람이 치른 2천만 명의 목숨값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 그 극심한 고통에 대해서도 잘 모르죠. 고맙습니다. 당신이 내 심장을 흔들어놓았어요.'

 

 

 

  우리는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었어. 전선에 나가 싸웠다는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지. 하지만 우리끼리는 계속 연락하며 지냈어.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람들은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지. 30년이 지나서야...... 모임에 초대도 하고......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릴르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퇴각하다가 땅바닥에 누워 쉴 때면 우리에게 자기들 외투를 벗어주고 본인들은 얇디얇은 군복만 입고 버티던 남자들이었는데. '우리 소녀병사들...... 우리 소녀병사들부터 덮어 줘야지......' 그러면서. 어디선가 솜이나 붕대 조각 같은 것을 구해와서 가만히 '자, 받아, 필요할 거야......'라며 건네주기도 했어. 수하리 하나라도 있으면 같이 나눠 먹었지. 전선에서 남자들은 따뜻하고 선량했어. 다른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그런 건 아예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차라리 아무 말 않겠어...... 아무 말도...... 무엇이 우리의 추억을 훼방 놓는 줄 알아? 그 추억들을 견딜 수가 없다는 점이야......

 

 

 

  "우리 병실에 부상병 둘이 있었어...... 독일군 병사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우리 전차병이었지. 그들을 살피러 갔어.

  ― 좀 어때요?
  ― 난 좋아요.   
  우리 정차병이 대답했어.
  ― 하지만 저 친구는 안 좋은 거 같아요.
  ― 저 사람은 파시스트인데......
  ― 아니, 나는 괜찮다니까요. 저 친구가 안 좋지.

  그들은 이미 적이 아니었어. 그저 사람들, 부상당해 옆에 나란히 누운 사람들이었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인간적인 교감이 생겼던 거야.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어.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한번은 의사가 헌혈할 때 내 주소를 적어놓자고 제안하더라고. 혹시 내 피를 받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지 누가 아느냐면서. 그래서 종이에 주소를 써서 병에 밀어넣었지.
그러고 나서 얼마 후였어. 두 달 정도 지났을까. 당직을 마치고 내 방에 와서 잠이 들었는데 누가 나를 깨우는 거야. 

  ― 일어나, 일어나보라니까. 네 오빠가 왔어.
  ― 무슨 오빠? 나는 오빠 없는데.

  내 방은 기숙사 맨 꼭대기층이었어. 그래서 1층으로 내려가 누가 왔는지 봤지. 웬 젊고 잘생긴 중위가 서 있더라고. 내가 물었지.

  ― 여기 오멜첸코를 찾은 사람 있나요?

  그러자 그 중위가 대답했어.

  ― 내가 찾았어요.

  그러고는 나하고 의사하고 같이 쓴, 내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여주는 거야.

  ― 자, 여기...... 나는 이제 당신하고 피를 나눈 형제예요......

  사과 두 개하고 작은 사탕 봉지를 가져왔더라고. 그 시절만 해도 사탕은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는 아주 귀한 것이었지.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사탕이 또 있을까! 병원장을 찾아가 그랬어. 오빠가 왔다고. 그래서 휴가를 받았지. '극장에 갑시다!' 중위가 나를 극장에 초대했어. 나는 태어나서 그때까지 극장이라는 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극장엘 가게 된 거야. 게다가 남자하고. 잘생긴 청년하고. 그것도 장교하고!
  며칠 후 중위는 보로네시 전선으로 떠났어. 작별인사를 하러 왔기에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줬지. 휴가를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그때 부상병들이 잔뜩 밀려들어서 휴가를 받을 수가 없었거든.
  나는 한 번도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어. 편지를 받는 게 어떤 건지도 몰랐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 편지가 온 거야. 삼각형으로 된 편지봉투를 펼쳐보았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어. '당신의 친구, 기관총 소대 지휘관이...... 장렬하게 전사했음을......' 나와 피를 나눈 형제, 바로 중위의 전사를 알리는 통지서였어. 그 사람은 고아였거든. 그래서 아마 그 사람한테 있던 유일한 주소가 내 주소였던 모양이야. 내 주소...... 그 사람은 전선으로 떠나면서 나한테 어디 가지 말고 병원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어. 그래야 전쟁이 끝나고 나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전쟁 중에는 서로를 잃어버리기 쉬워'라며 걱정했지. 그러고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은 거야...... 갑자기 무서워지더군. 쿵쿵쿵 심장이 마구 뛰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지. 가서 내 피에 대한 복수를 하자고. 이제 내 피가 분명 어딘가에 쏟아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는 게 또다른 끔찍함이었어. 전쟁터에서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절대 믿지 않아. 항상 소매를 팔꿈치까지 말아올리고 다니는 독일군이 모습을 드러내고 오 분이나 십 분쯤 지나면 공격이 시작됐어. 그러면 온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하지. 오한도 나고. 하지만 그건 처음 총을 한 발 쏘기 전까지만 그래...... 막상 전투가 시작되고......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어느새 그런 기억은 모두 사라져버려. 다른 전우들과 함께 정신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거야. 무서운 거고 뭐고 느낄 새도 없지. 하지만 다음날이면 벌써 잠이 안 와. 또 무서워져서. 전부 다 기억이 나는 거야.

 

 

 

  "나는 군대에서 기록병사였어...... 그 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사령부로 보내려고 설득들을 하는데...... 내가 전쟁 전에 사진사로 일한 사실을 안다면서 자기네 사령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나는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게 싫었어. 전사한 사람들을 찍고 싶지는 않더라고.  주로 병사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지. 담배를 피운다거나 포상을 받고 활짝 웃는다거나 할 때, 그때 나한테 컬러필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흑백필름밖에 없었거든. 아, 연대 깃발 하강식...... 정말 멋지게 찍을 수 있었는데......
  요즘...... 기자들이 찾아와 물어. '전사자들 사진도 찍었나요? 전장은......' 그런 사진이 있나 뒤져봤지. 별로 없더라고. 죽음에 대한 사진은 잘 안 찍었거든...... 부대에서 누군가 전사하면 병사들이 나를 찾아와 사진을 부탁했어. '혹시 그 친구 살아 있을 때 사진 있나요?' 그러면 같이 사진을 찾는 거야...... 환하게 웃고 찍은 사진을......
 
 - 엘레나 빌렌스카야, 중사, 기록병 

 

 

 

  "나는 고리키 시 통신학교의 우편근로자 양성 과정에 들어갔어. 과정을 마치고 전방부대인 제60보병 사단으로 발령받았지. 연대 우체국에서 장교로 복무했어. 그래서 최전선 병사들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지. 얼마나 좋은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편지에 입을 쪽쪽 맞추더라고. 하지만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독일군 치하에 사는 병사들도 많았거든. 그런 병사들은 편지를 받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익명으로 편지를 썼지. '안녕하세요, 군인 아저씨! 이름 모를 소녀가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적군과 싸우세요? 언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시나요?' 밤마다 앉아서 편지를 썼어...... 전쟁 내내 그런 편지를 수백 통도 넘게 쓴 거야......"

 - 마리야 알렉세예브나 렘네바, 소위, 우편병

 

 

 

  아버지는 진즉 돌아가셨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해. 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두고 스탈린을 믿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니 눈이 먼 사람들이니 하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아. 그들은 오히려 스탈린을 두려워했어. 레닌의 사상을 믿었지. 스탈린을 믿은 게 아니야. 다들 그랬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어. 스탈린이나 레닌을 믿은 게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믿었지. 나중에 사람들이 이름 붙인 것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그걸 믿었어. 그들이 꿈꾸는 자들이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해. 하지만 눈먼 자들이었다는 의견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 절대로!

 

 

 

  "우리는 애를 참 많이 썼어...... '여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리고 우리가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하지만 남자병사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깔봤고 아주 거만하게 굴었어. '여자들이 무슨 전쟁을 한다고......'라는 식이었어.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남자가 되겠어? 그럴 순 없는 거지. 우리 생각은 하나였어. '우리는 원래 남자와는 다르게 태어났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맡을 소대로 안내를 받았어. 첫 명령을 내렸지. '소대, 차렷!' 그런데 누구 하나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누워 있거나 앉아 있고, 담배 피우고, 심지어 어떤 병사는 '아, 아!' 하고 늘어지게 기지개까지 펴더라니까. 한마디로, 다들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 이미 뛰어난 정찰병들인 자신들이 갓 스무 살짜리, 그것도 생면부지 여자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로서는 굴욕이었던 거지. 나는 그 점을 너무 잘 이해했기 때문에 '바로!'라고 다시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 좋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안 생기더라고. 하지만 몇 달 후에 그 사람 막사로 거처를 옮겼지. 달리 어떡해? 사방이 남자들인데, 그 남자들이 무서워 떨며 지내느니 한 남자랑 같이 사는 게 낫잖아. 오히려 전투에 나가는 건 무섭지 않았어. 전투가 끝나고, 특히 전설을 재정비하면서 쉴 때가 무서웠지.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불을 뿜을 땐 나를 '누이! 누이!' 라고 부르다가도 전투만 끝나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다들 기회만 엿봤으니까...... 

 

 

 

  "나는 콤무날카에 살았어. 이웃 여자들에겐 다 남편이 있었지. 여자들이 걸핏하면 나를 모욕했어. '하, 하, 하...... 그러니까 거기서 남자들이랑 어땠는지 이야기 좀 해봐......'라며 대놓고 비웃었지. 내가 감자 요리를 하면 감자 냄비에 식초를 부었어. 소금을 한 숟가락씩 쏟아넣기도 하고...... 하, 하, 하......
  우리 지휘관이 제대를 했어. 나를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했지. 호적등록소에 가서 혼인신고만 했어. 그게 전부였지. 결혼식은 생략했고. 1년 후에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 가버렸어. 우리 공장의 식당 책임자 여자한테. 남편이 떠나면서 그러더군. 그 여자한테서는 향수 냄새가 나지만 나한테는 군화와 발싸개 냄새가 난다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살아. 이 세상 천지에 나 혼자야.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 예카테리나 니키티치나 산니코바, 중사, 사수

 

 

 

  결혼을 할까 아니면 못할까? 결혼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할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할까? 캐모마일 꽃으로 점을 쳤어...... 화관을 작은 강에 던지고 양초를 녹였지...... 기억나. 어느 마을에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여자마법사가 사는 곳을 가르쳐줬어. 모두 그 여자에게 몰려갔지. 그중엔 남자장교도 몇 명 끼어 있었어. 소녀병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갔고. 여자마법사는 물로 점을 쳤어. 손금도 보고. 한번은 또 거리의 악사를 만나 종이를 뽑기도 했지. 종이카드 같은 거였어. 나는 행운의 카드를 뽑아들었어...... 하지만 내 행복이 어디에 있다는 거야, 어디에?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 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알다시피 러시아어 어휘가 좀 많아야지......
  어느 날은 춤을 추고 젊은 청년이 나를 바래다주는데 갑자기 몸이 안 좋은 거야.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더라고. 겨우겨우 걷다가 눈더미 위에 주저앉았지. '왜 그래요?' '아니 괜찮아요. 춤을 너무 많이 췄나봐요.' 전쟁 때 입은 두 번의 부상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결국 전쟁 때문인 거지......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했어. 연약하고 가냘픈 여자가 되는 법을. 하지만 발은 이미 치수 40의 군화에 길들여졌는데. 누가 나를 끌어안으면 영 어색했어. 그리고 내 일은 내가 책임지는 데 익숙했지.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바라면서도 정작 그 말을 들으면 이해를 못했어. 나한텐 그개 애들 장난 같았으니까. 전선에서 남자들과 지내며 러시아 쌍욕만 들었으니까.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