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 나혜석

2019.08.31 10:15

 

 

 

 

 

금강산을 보지 못하고 조선을 말하지 못할 것이며, 닛코를 보지 못하고 일본의 자연을 말하지 못할 것이요, 소주나 항주를 보지 못하고 중국을 말하지 못하리라는 말같이, 스위스를 보지 못하고 유럽을 말하지 못할 만큼 유럽의 자연 경색을 대표하는 나라가 스위스요, 그 중에도 제일 화려하고 사람 운집하는 곳이 이 제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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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른쪽에는 캐나다 대표가 앉고, 왼쪽에는 영국 차석 전권이 앉게 되었다. 이런 자리에서 어학에 능통하면 유익한 대화가 많으련만 큰 유감이었다. 어학이란 잘하면 도리어 결점이 드러나나, 못하면 귀엽게 보아주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맞으면 다행이요, 아니 맞으면 웃음이 되어 오히려 애교가 되고 만다. 참 무식한 것이 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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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큰 나라 사이에 있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과히 할 일이 없어, 하늘의 은혜를 입은 자연경관을 이용해 수입의 대부분을 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히 있다. 동양인은 물론이요, 동양에 거주하는, 즉 상해, 북경, 천진 등지에 있는 서양인을 끌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매년 거액을 들여 스위스로 피서를 간다. 강원도에는 삼방약수가 있고, 석왕사가 있고,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고, 내외금강 경승지가 있으니, 이렇게 구비한 곳은 세계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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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림 속에서 흔히 보던 실물, 즉 흰 고깔을 쓰고, 허리를 잘록 매고, 넓은 치마를 입고, 나막신 신은 소녀들과 단추를 많이 단 짧은 붉은 저고리를 입고 통이 넓은 검은색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덜걱덜걱 나막신 소리를 내는 소년 무리가 마중 나와 사진을 박으라고 성화다. 사진을 찍은 다음에는 손을 내밀어 돈을 청구하여 돌아서서 비교하며 삐쭉삐쭉하거나 좋아라 하거나 야단이다. 풍속을 보이는 것이 몹시 상업적이었다. 영국인, 미국인들이 다니며 버릇 가르치는 것이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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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는 네덜란드의 수도이거니와 조선 사람으로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이다. 1918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였던 이준 씨가 회의석상에서 분사한 곳이다. 이상한 고동이 생기며 그의 외로운 영혼이 우리를 만나 눈물을 머금는 것 같은 감이 생겼다. 그의 산소를 물어도 아는 이가 없어 찾지 못하고, 다만 경성에 계신 그의 부인과 따님에게 그림엽서를 기념으로 보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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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는 한 집 건너 카페가 있으니, 피곤한 몸을 쉴 때나 머리를 식힐 때 이 카페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따라놓고 반나절이라도 소일할 수 있다. 밀회 장소로도 이용하고,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혹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교기관처럼 되어 있다. 일반 유럽인의 성격은 동적이어서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또 사교적이라 곁에 사람 없이는 못 견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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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미술계는 야수파 일군의 세력이 크다. 즉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드랭 등의 그림이 세력을 점령하고 있다. 그 외 누구든지 독특한 필법만 창작하는 동시에는 대가의 대열에 참가할 수 있다. (중략) 처음 파리에 와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 그림을 보고 나면, 너무 엄청나고 자기라는 존재는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일시적으로는 낙망하게 된다. 마치 명태 알 한 뭉텅이가 있다면 대가의 그림은 그 뭉텅이만하고, 자기는 그 가운데 한 알만한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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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남자아이가 아침저녁을 먹을 때면 테이블 위에 식기를 가져다놓고, 누나들이 설거지하면 행주질을 하고, 추운 아침에도 계단 걸레질을 한다. 남자아이라도 어렸을 때부터 차별 없이 자기 일을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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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권 5리라를 내고 건물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과분한 기대와 긴장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과연 그림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지금까지 인쇄물로 보던 것과 판이한 것을 보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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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을 볼 때는 그리면 곧 그같이 될 듯 하나, 그리고 보면 생각하던 것과 판이하다. 이럴 때마다 대가와 걸작에 대한 존경이 더하여 간다. 그림은 감각적인 만큼 과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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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뒤편에 있는 페르치 예배당과 바르디 예배당을 찾았다. 조토가 그린 벽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몸이 불편한 사제 한 사람이 다리를 절며 설명을 하겠노라고 따라 다닌다. 이탈리아 전국의 유명한 전시관에는 이렇게 상업적인 안내자가 있어 관람객을 괴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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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런던에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여선생 하나를 정했다. 막 60여 세가 된 처녀로 어느 초등학교 교사요, 독신생활을 하는 원기 있는 좋은 할머니였다. 팽크허스트 여성 참정권운동연맹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의 간부였다. 지금도 여자의 권리 주장만 나오면 열심이다. 그는 이러한 말을 한다.

"여성은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줄여 저축하여야 한다. 이것이 여성의 권리를 찾는 운동의 제1조이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아니하였다. 영국 여자들의 앞선 깨달음에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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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는 만년에 시력이 쇠약해지고, 귀머거리가 되고, 궁핍하였다. 판화를 그리려고 조국을 떠나 멀리 적막한 남프랑스 보르도에 우거하였다가 1828년 4월에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그의 묘를 보고 아울러 그의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또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이 생각 들었다. 내 발길은 좀체 떨어지지를 아니하였다. 내가 이같이 감흥해 보기는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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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선생을 만나기 위해 인터내셔널 하우스를 찾아갔다. 우리 숙소 가까이에 있었다. 유명한 록펠러 씨가 세계 각국 유학생을 위해 건설한 기숙사이다. 설비가 완전하며, 분위기가 코즈모폴리턴적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에는 조선인 유학생이 많다. 도서관, 기숙사 등의 시설이 커서 수천 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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