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실천은 몇 가지 계기를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행위란 아직 없는 (도달해야 할 목표를 말합니다. 즉 최종 분석을 거친 후에 그 분석에 의거해서 삶을 다시 일구어내기 위하여 상황 속에 최초로 주어진 것들을 재배치하는 것을 말합니다)을 위하여 지금 있는 것 (변화시켜야 할 상황으로 주어진 현실의 장을 말합니다)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정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또한 긍정을 동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정 속에서 우리는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서 아직 없는 것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와 같이 실천은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을 극복하며, 현실을 보존하는, 그리고 현실을 미리 앞서서 변경하는 실천적인 지식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16p)

 

이로써 이제 실천적인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의 작업은 부르주아지에게 봉건제도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해주었고, 또 자신에 대한 당당한 의식 속에서 부르주아지 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6p)

 

직업은 이때 그 자체가 공급될 일자리요 수행하게 될 역할을 뜻합니다. 따라서 직업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장차 태어날 어떤 한 인간의 장래를 선천적으로 정의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1975년에는 의사와 교사 등의 일자리가 이러저러한 수만큼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할 때, 어떤 한 범주에 속한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곧 가능성의 장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과 그들이 선택해야 할 공부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종의 운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가 그들을 기다리는 경우는 흔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이 일자리라는 것도 사실상 그들이 그날그날 수행해야 할 기능의 단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배계급은 자신의 궁극적 목표인 이익에 따라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의 수를 결정합니다. (32p)

 

 

이런 측면에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때로는 (나치 사상가들의 침략적 민족주의에서 보는 것처럼) 노골적이고, 또 때로는 (자유주의 휴머니즘, 즉 거짓된 보편성에서 보는 것처럼) 가면을 두른, 이데올로기적 특수주의의 선동가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점에서 우리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자기 자신과 무관한 일을 하도록 임무가 부과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를 그 누구도 지식인이라고 부르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실제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을 마치 과학 법칙인 양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정신과 의사들은 (예를 들어) 아프리카인의 두뇌에 대한 해부학과 생리학에 의거해서 아프리카인의 열등성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자기들 말로는 엄밀한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겉으로만 인간 모습을 한 식민지 원주민을 제외하고 나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부르주아 휴머니즘을 유지하는 일에 기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작업들이 여성의 열등성을 성립시켰습니다. 이들 정신과 의사들에게 있어서 인류란 결국 백인 남성 부르주아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36p)

 

 

실제로 장학제도 (교육은 무료지만 생계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합니다)는 권력층으로 하여금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모집함에 있어서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정책을 시행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게다가 중간계급의 자녀들 또한 그들 가정의 경제 형편 때문에 가능성의 장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중간계급의 하위층에 속하는 가정의 경제 형편을 볼 때, 자신의 아들에게 6년 동안 의학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이처럼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엄격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중간계급의 중간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지배계급의 특수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아왔기 때문에, 그의 직업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국에는 그를 중간계급에 속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반적인 경우 노동자와는 전혀 접촉이 없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고용주에 의한 노동자 착취의 공범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는 잉여가치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적 존재와 그의 운명은 밖에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중간층의 인간, 중간 정도의 인간, 중간계급에 속한 인간이고, 따라서 그의 활동과 관련된 일반적인 목표는 결국 그 자신의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37-38p)

 

그 이후 일본의 교육 체계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위의 예를 언급한 것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나타나는 모순이 사실은 지배계급의 모순되는 요구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그의 유년 시절부터 기다리며 맞이하는 모순의 모델, 그를 모순에 찬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모순의 모델을 구성하는 것은 실제로 지배계급 자신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지배계급으로부터 우선 복종을 배웁니다. 그 이후에는 복종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탐구 정신-자유롭고 보편주의적인 탐구 정신-이 그의 바깥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국가, 정치, 지배계급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 특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자유롭고 보편주의적인 이 탐구 정신이 결국에는 이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중략) 결국 부르주아지 혼자만을 위해서 획득된 자유가 이처럼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는 마치 명백한 보편성인 양 비쳐지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지 않느냐는 등의 허울 아래 말입니다. (41-43p)

 

최근 들어 사람들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풍요에 대해서 떠들도록 가르치고 또 그것을 반복하게 하려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것은 그에게 인류의 3분의 2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의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이런 서로 모순된 생각들에 합치라는 겉모양을 부여하려고 한다면, 즉 명백하게 거짓된 관념을 가지고 그가 자신의 탐구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한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자유로운 과학적, 기술적 사유를 그것과 무관한 규범 때문에 중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3p)

 

결국 지식을 가진 모든 전문가는 잠재적인 지식인에 해당합니다. (51p)

 

그러나 선별에서 밀려난 사람(배제된 사람)은 선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사회 전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는 낡은 가치관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노동계급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일이 발생하며, 이것이 지배계급 속에 심각한 변화를 일으키는 때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지식을 가진 많은 전문가가 지식인으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사회 속에 나타난 모순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했기 때문입니다. (52p)

 

따라서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실천적인 진리(자기의 모든 규범까지 포함한 실천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와 지배 이데올로기(자기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까지 포함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53p)

 

다음으로 혜택 받지 못한 계급은 지식인을 배출해낼 수 없습니다. 지식인은 오로지 실천적인 진리를 가진 전문가로부터만 나올 수가 있는데, 바로 이 전문가가 지배계급의 선택에 의해서, 즉 지배계급이 전문가를 만들어낼 목적으로 할당한 잉여가치의 몫에 의해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56p)

 

사람들이 지식인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사람들은 식이요법 처방전을 내보이고 거기에다가 의사의 설명을 더하면서 당당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이 어떤 주장을 한 다음 사람들이 그 주장을 다시 취할 때, 그 주장은 그것을 최초로 제기한 지식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주장 그 자체로만 제기될 것입니다. 지식인의 주장은 마치 그것이 모든 사람의 논리인 것처럼 주어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주장 그 자체가 익명의 논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57p)

 

지식인의 사유는 끊임없이 사유 그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의 사유는 이 되돌아봄을 통해서 언제나 사유 그 자신을 특이한 보편성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계급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이미 보편적인 것을 획득했다고 스스로 믿는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의 사유는 바로 이 되돌아봄을 통해서 사유 그 자신을 이 계급의 편견에 의해 은밀하게 특이화된 보편성으로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와 같이, 그가 아무리 인종주의의 비정상적인 측면을 폭로하는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기 자신이라는 이 유래 없는 괴물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통해서 그의 어린 시절부터 뿌리박힌 인종주의를 일소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결국 지식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중략) 실제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무언가 진전을 이루고자 할 때, 지식인이 피해야 할 커다란 위험 중의 하나가 너무 성급하게 보편화하는 일입니다. (64p)

 

지식인의 목표는 실천적 주체를 실현하는 일이요, 실천적 주체를 배출하고 지탱해줄 사회의 원칙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66-67p)

 

지식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태인을 처형햐는 일 또는 슬라브 제국에서 있었던 유태인 박해 정책, 유태인 대량 학살 등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궤변을 행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고발하는 일입니다.  (중략) 사건의 수준에서 일하는 것이 지식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이념을 실어 나르는 사실을, 즉 하나의 특이한 보편을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69p)

 

지배계급의 원리 자체와 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지배계급과 싸우는 척하면서 그 계급에 봉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지식인에게 제기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이러한 급진주의적 길에 들어서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개량주의자의 온건한논법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많은 사이비 지식인이 (인도차이나에서 벌인 우리의 전쟁에 대해 또는 알제리의 독립 전쟁 동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식민지 통치 방법이 지나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해외 영토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에서 비롯된 것이든 모든 폭력에는 반대합니다. 나는 학살자도, 희생자도 둘 다 되기가 싫으니까요. 내가 식민지의 지배자에 대한 원주민의 반항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급진적인 사유에서 보면 분명히 이러한 사이비-보편주의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식민지의 피지배자에게 자행되는 식민지 지배자의 만성적인 폭력(테러에 의해 지탱되는 심한 착취, 실업, 영양실조)에 찬성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종국에는 사라질 사소한 악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식민지의 피지배자가 자신을 억압하는 식민지의 지배자에 대항하여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에는 반대합니다.” (72-73p)

 

진정한 지식인은 개량주의란 결국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 하여금 그의 고용주인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지배계급에 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이중으로 유리한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보편주의적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사이비 지식인에 의해서 보편적인 것이 이미 성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인-즉 불편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괴물로 파악하는 지식인-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74p)

 

지식인이란 전쟁을 그저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지금 이 순간 그 자신이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이상적인 평화-피억압자의 승리를 통해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 세워질 인간의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차라리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에 대한 관념-가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꿈을 꾸는 도덕주의자요 이상주의자라고 여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이비 지식인의 태도 때문입니다. (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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