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이나 되어서 이렇게 쓰잘데기없는 글이나 끼적대는 나자신이 싫구나.

하지만 내가 위안을 받을 곳은 이제 이곳밖에 없어...ㅠ

6년 전에는 이 블로그가 이렇게까지 내게 소중한 공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 때는 키보드 앞에만 앉으면 숨이 막혀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생각들을 수첩에 쭉 적었는데 오늘 다시 훑어보니 내 정신상태가 많이 맛이 간 것 같다.

지금 이 일기는 모두 잡념 수첩에 적었던 내용들을 바탕으로 적는 것이다.


#0. 이번주에 가장 많이 들은 곡 :

  1. Gnarls Barkley - Crazy
  2. Alt-J - Left Hand Free
  3. The White Stripes - Fell In Love With A Girl
  4. The White Stripes - The Hardest Button To Button
  5. Franz Ferdinand - Do You Want To
  6. Spring - Mia Doi Todd
  7. The Rolling Stones - Doom And Gloom
  8. Unknown Moral Orchestra - Swim And Sleep (Like A Shark)
  9. The 1975 - Paris
  10. King Krule - Baby Blue





#1. 월요일

 - 선생님이랑 다시 면담을 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갑자기 까먹어서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온통 '라디오헤드가 새 앨범을 냈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면담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 찜찜함은 대체 뭐지....

 - 사실 주변에서 단 한번도 나보고 공부 잘하라고 압박을 한 적도 없었다. 나 혼자서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언니들이 너무 멋져 보여서 동경했을 뿐이지. 지금도 내가 맨날 질질 짜는 이유가 누가 나보고 무조건 일류대 가라고 강요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한테 스트레스를 줘서다. 

어쨌든 공부는 결국에는 잘 해야겠다. 알아서 좋은 대학 잘 가겠지 뭐. 고등학교 준비할 때도 누가 나보고 외고 가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알아서 외고 갔잖아. 


#2. 화요일



* 이날 심란했던 탓에 끄적여 놓은 것도 죄다 우울하다.


- 나는 너그럽지도 못하고 우리 반 애들처럼 이타적이지도 못한 지독한 개인주의자라 이렇게까지 무능력한 모양이다.

- 슬픔에는 우선순위가 없는 것 같다. 슬픔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중요도를 따질 겨를도 없이 새로 생겨나는 대로 슬퍼해야 한다. 내 슬픔도 다 감당하기가 벅차서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도 생각해 줄 겨를이 없다. 누군가가 남을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자기 슬픔을 뒤로하고 타인의 슬픔을 먼저 생각해주는 거니까. 

- 내 친구들 중 내가 가장 공부 못한다는 사실이 뽀록난 것 같다. 슬프다.

- 내가 아주 확고한 정신세계를 가졌으면 공부를 못해도 똑부러지게 살았을 텐데, 내 세계는 지나치게 현실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자리잡혀 있어서 슬프다.

- 평생 굶주리고 돈도 못 벌고 사후에나 능력을 인정받아도 좋으니 나한테도 어떤 천재성이 있으면 좋겠다. 



#3. 수요일



- 수학 수업을 듣던 중 지난주에 나에게 아무 이유없이 시비를 걸었던 청소부를 응징하는 상상을 했다. 먼저 그에게 돌진해서 호스를 빼앗아 든 뒤 그 물을 내게 뿌려버리는 거다. 내가 나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적시는 모습을 본 그 작자의 표정은 아마도 아주 썩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사람에게도 신나게 물을 먹이고, 복부를 가격해서 눕힌 뒤 미친듯이 발로 걷어찬다. 내가 이성을 차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면 청소부는 온데간데없고 분필로 그린듯한 졸라맨 낙서만이 남아 있다. 3차원에서 1차원이 될 때까지 그 나쁜놈을 흠씬 두들겨 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누가 나를 체포해 갈까봐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그 사람이 워낙 나에게 손에 꼽을 만큼 불쾌한 기억을 남겨 주었고, 내가 진짜로 그 사람을 이렇게 두들겨 팬 건 아니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 이제껏 길거리에서 할머니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는 꼬박 받았다. 왜냐하면 모든 할머니들은 손녀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기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고, 나는 그분들이 빨리 전단지를 나눠주고 수고를 덜었으면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서대문역 입구에서 내가 할머니에게 전단지를 받으려고 손을 뻗자 할머니가 나를 흘긋 보더니 무시하고 뒤에 있는 사람에게 전단지를 줬다. 직장인들이 무지하게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에 내가 뻘짓한 것을 사람들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쿵쾅대면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갔다. 다시는 선행을 베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니 나 자신도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마당에 다른 사람을 도우려 했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후가 지나기도 전에 내 마음은 다시 약해질 것이고, 아마 내일 아침에도 나는 또다시 전단지를 받으려고 손을 뻗을 것이다.


#4. 목요일

 -개연성이 엄청난 꿈을 꿨다. 친한 친구 둘이 나보고 재밌는 것 알려주겠다고 하고 나를 학교 정원으로 데려가더니 담배를 꺼냈다. 내가 "나도 피워보고 싶엉!!!"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나타나서 얼른 튀었다. 선생님이 우리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다음 날 학교에 와보니 '글쎄 개교한 이래 처음으로 학교에 흡연자가 생겨났다더라, 그것도 세 명이나'라며 다들 웅성거리고 있었다. 셋이서 엄청 쫄아 있었는데 갑자기 사회 선생님이 와서 우리보고 담임 선생님이 찾으니 교무실로 가라고 했다. 긴장하면서 교무실 문을 열다가 일어났다. 지금 생가하니 너무 웃기다.


#5. 금요일

- 같이 앉자마자 2시간 만에 3년을 함께한 것처럼 친해진 짝꿍과 영화를 봤다. 2주 전에 조퇴할 때 분명히 '이걸 끝으로 난 이제 정신 차리고 공부할 거다'라고 맹세했건만.... 

히어로들이 공항에서 깽판을 쳐 대는 장면을 보는데 그걸 다시 다 복원하려면 시청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야 할지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그래도 스파이더맨(우리 번번팅 언니 또래라 충격받았다)이 처음 등장할 때 나왔던 노래는 정말 좋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다운받아서 듣기 시작했다.

- 바나나 초코파이를 먹는데 갑자기 그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무슨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검정고무신도 아니곸ㅋㅋㅋㅋ 요즘 왜이렇게들 바나나를 좋아하는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 토요일


- 아마도 당분간 희곡 덕질을 하게 될 것 같다.

- 오늘 깨달은 것 :

나는 어린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예쁜 물건을 갖고 있으면 다 빼앗가 가니까. 

내 또래 애들 (중학생 ~ 대학생)도 안 좋아한다. 너무 무섭게 생겼고 앞날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사는 것 같으니까.

어른들도 별로 안 좋아한다.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어린애들을 쥐락펴락하고 앞날 걱정은 하면서 나이에 걸맞는 깊이 있는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사는 것 같으니까.

내가 특정 집단만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사람 자체를 싫어하나 보다.

그래도 눈이 맑은 사람은 정말 좋다.


#7. 일요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 그 때문에 공부가 평소보다 일찍 끝났는데 딱히 하루가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여가 시간이 많이 생겨나니까 화가 났다.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에 적은 것은 아침에 내가 일어나자마자 적은 꿈 일기다. 거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지금 깬지 10분도 안되었는데 꿈이 너무 현실적으로 웃겼닼ㅋㅋㅋㅋㅋㅋ 학교가 일찍 끝났는데 24기 애들이 학예회를 한다고 해서 친구들이랑 구경했다. 너무 형편없어서 겉옷 입고 짐 챙겨서 나왔다.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랑 마주쳐서 함께 지하철 역으로 갔는데, 내 가방에서 델리만주(지난번 꿈에서 사놓곤 안 먹었는데 이번 꿈에서 나왔다ㅋㅋㅋㅋㅋㅋ)를 꺼내 먹었다. 2학년 애들 셋이 지나가길래 걔네한테 하나씩 주고, 선생님 하나 드리고, 나머진 내가 다 처먹었다. 학예회 보는 동안에도 과자를 엄청 먹었기 때문에 살이 찔까봐 걱정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명동에 도착했는데 선생님도 함께 내렸다. 내가 "선생님 지하철 타고 다니시는 줄 몰랐어요. 운전해서 출퇴근하는 줄 알았는데."라고 하자 선생님께서 평소에는 차타고 다니는데 오늘은 문학가 친구 부탁으로 번역 작업을 해야 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말이지만 (심지어 선생님은 국문과 출신이라 외국인 작가가 자기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번역 작업을 맡을 가능성이 적다!) 꿈에서는 아! 그렇군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ㅋㅋㅋㅋㅋ 심지어 그 문학인 친구가 누구일지 맞추기까지 했다ㅋㅋㅋㅋㅋㅋㅋ

명동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예쁜 붉은색으로 페인트칠한 작은 건물이 하나 나왔다. 체코에 있을 법한 건물이었다. 건물 1층에 알라딘 서점 간판이 달려 있었고 그 앞에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선생님을 보고 놀라더니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 집은 서점 바로 옆에 있었다. 작은 계단을 올라가 보니 전에 살던 아파트랑 내부 구조가 완벽하게 똑같은 집이 나왔다. 내 방도, 아이맥도, 우리 어항도 그대로 있었다. 갑자기 현실에서의 정신이 돌아와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이 우리 집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생님한테 방 구경을 시켜드리고 나니 선생님이 상을 펴고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선생님과 급하게 학교를 나서느라 독서실에서 꼭 챙겨와야 했던 문제집을 안 챙겨왔다는 기억이 났다. (그것은 분명 고쟁이) 내일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선생님은 저녁만 드시고 갈 줄 알았는데 도무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편한 옷으로 못 갈아입고 있어서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이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엄마가 그림책놀이 준비하는 걸 거들어 주었다. (실제로는 1도 안 도와줌) 반딧불이 날개를 붙이면서 내가 엄마한테 아주 작게 "저 사람 오늘 아예 갈 생각이 없나봐!!!"라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아빠가 깨웠다.'


ㅋㅋㅋㅋㅋㅋㅋㅋ다시 생각해봐도 웃기다.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은 처음이다. 꿈답게 약간 말이 안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너무 리얼했다. 게다가 우리 집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일어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기분이 좋았다. 



- 14살 때 이후로는 우울할 때가 늘 많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오히려 가장 불행하다고 느꼈던 그 순간마저도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슬퍼도 언젠가 돌이켜보면 이 날이 즐겁게 느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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