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왜이렇게 블로그 하는게 재밌는 걸까....

#1. 월요일




월요일날 수능이 D-199로 떨어졌다.

지난 시간 동안 열심히 살아왔건만 수학 성적은 그대로이고 (쭉 올라서 기뻐했으나 다들 잘 봐서 아무 이득을 보지 못함) 내신은 개판으로 만들고 국어도 갑자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아직 너무 많은 것들이 내게 남아 있는데 6월 모평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3년간 내가 해온 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싶은 상태로 이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야자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갑자기 자신감이 솟구치면서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나의 '뻘짓'이 적절한 시기에 아주 좋은 결과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고등학생이 된 이래 단 한 번도 내 기대치만큼 일이 잘 풀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나면 다시 기운이 빠진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던 간에 시간은 꾸역꾸역 잘 흘러가고 있으니 무슨 전형이라도 써서 결국엔 어느 대학에라도 입학하지 않을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가 문제지.




#2. 화요일


이날은 매우 정신이 없었다. 친구랑 같이 하루 종일 0반에 갇혀서 스승의 날 편지를 썼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4시간을 쭉 논술 수업을 받았다. 글만 쓰다가 하루가 다 가버렸다. 나중에는 더이상 뭘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글을 억지로 토해냈다.





내가 본 CCM들 중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팀이 학교에 찾아왔다. 자아도취에 빠져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만 해도 종교를 그렇게까지 한심스럽게 보진 않았는데, 학교에서 종교 수업을 받고 나니 신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학생들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하고 모독하게끔 만든 장본인에게 벼락을 내렸을텐데, 여전히 그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며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신은 아무래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성경 한 구절보다 수능특강 독서에 나오는 동양 철학 지문이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주고 위안을 준다.

내가 가장 미워하면서도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라 나 자신 뿐이다.




#3. 수요일


수학 시간에 또 정해진 시간 내로 문제를 풀지 못해서 상처를 받았다.

벌써 다섯 번 불려 나가서 세 번이나 문제를 제때 풀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저능아 같은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 학생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내일 숙제 내러 교무실 갈 때도 한 천만 번은 스스로 목을 졸라 버릴 거다.

심지어 이번에 푼 문제는 순서쌍 (a, b, c)를 구해야 하는 걸 깜빡하고 (a, b)만 구해 버려서 더 망했다. 





독서실에 둔 문제집들은 멀쩡한데, 집에 있는 문제집들만 유독 책벌레가 많이 기어다닌다. 너무 쬐끄만 녀석들이라 죽이기는 불쌍한데, 놔둔 채로 공부하기엔 너무 무서워서 보일 때마다 족족 안 쓰는 종이로 눌러 죽인다.

이전에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뇌에게는 몇 시간 정도 의식이 남아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짓눌린 책벌레는 곧바로 뇌가 터져서 즉사할까, 아니면 의식이 남아 있을까? 의식이 남아 있다면 마지막으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종이 위로 보이는 내 거대한 콧구멍? 아니면 자기 몸을 둘러싼 거대한 활자들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퍼런 샤프?

무슨 생각이 들까? '난 그냥 종이나 갉아 먹으러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집에 오자마자 양말을 벗어던졌다. 밥 먹고 나서 공부하다 옆을 돌아다 봤는데 양말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너 눈이 바트 심슨 닮았다는 말 많이 들어보지 않았니.




#목요일. 



아무래도 난 정리를 너무 잘 한다. 저 가지런하게 분류된 책들을 보라...! 

어린이날이라는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내 어린이날 선물은 수학 1등급이나 줬으면 좋겠는데.





바스티엥 비베스 책들을 덕질하다가 엄청난 그림 한 장을 발견했다.

가장 친한 친구 생일 카드로 써야겠다.




#5. 금요일




예뻐서 산 지우갠데 다시 생각해보니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것 같다.

마트에 가보면 국기 그림이 있는 물건이 정말 많다. 보통은 성조기나 영국 유니온 잭이 그려져 있는데, 그런 물건들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내 편지 보관함도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으니 내가 딱히 그들을 비난할 처지는 아니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물건들을 사는 걸까, 아니면 미국이랑 영국 국기가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들어서 사는 걸까?

만약에 일장기나 오성홍기가 그려진 물건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걸 살까?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 지우개를 쓰기가 왠지 부끄러워졌다.




#6. 토요일





휴일이라 토요스포츠 수업이 없는 날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골프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애매하게 학교에서 아침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밤에 '무드 인디고'를 보다가 미셸 공드리에게 입덕했다. 영화가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머리통을 자르거나 총을 갈기는 걸 봐선 (이렇게만 적으니 엄청난 고어 영화를 본 것 같다!) 감독이 분명 나처럼 잔잔하게 가학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갑자기 다 때려치고 나도 영화 감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뭔가를 해보면서 '이 쪽 분야로 내 인생을 완전히 투자해 버린다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을거야'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영화 감독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게 충분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걸 진작에 발견하지 못하고 흥미로워 보이는 또 다른 인생을 선택하게 되었을 뿐이지. 그렇게 생각해보니 좀 우울해진다. 또래 애들 중 예술 하는 친구들은 공부하는 애들보다 폭발적인 재능이 없으면 리스크가 크다는게 문제지 일찍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발견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멋져 보이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너무 확실하면서도 흐릿해서 슬프다.




#7. 일요일


온갖 괴상하고 우울하고 희망찬 생각을 하루에도 수천 번씩 하는데 그 생각들을 모두 흘려보내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선물받은 펭귄 클래식 노트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수첩 중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괜히 이것도 며칠 안 가서 아깝게 노트만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사은품으로 받은 수첩을 내 잡념들을 적는 용도로 쓰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만 벌써 한 페이지를 꽉 채웠다. 죄다 읽어보면 엄청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어젯밤 꿈에서 오사카를 경유해 아이슬란드로 갔는데, 오사카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 일대일 면담을 했다. 달라이 라마가 내게 긍적적으로 살라고 하면서 노르웨이 어로 뭔가를 말했는데 너무 웃겼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더니 트롤과 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어제 이상한 영화 봐서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 같은 내용 뿐이다.


아침에 어중간하게 일어나서 어중간하게 인강 듣고, 어중간하게 확통 풀다가 아무것도 안 풀려서 욕을 했다.

잠깐 눈 붙였다 일어나면 머리가 맑아지려니 해서 30분만 자려고 했는데 1시간 넘게 잤고, 다시 어중간하게 정적분을 풀었다.

왠지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좋아할 것 같은 맛이 나는 스파게티를 먹고 저녁 내내 논술 숙제를 했다. 최고의 졸작을 만들었다.

선생님이 이메일로 숙제 보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왠지 보내기가 쑥스럽다. 확실한 것은 절대 내 도메인이 들어가는 이메일 주소로는 절대로 숙제를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글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 논술 이외의 내 글들을 읽어보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내일부터는 열심히 살 것이다.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수능특강 수학책을 너기출만큼 열심히 덕질해주기로 결심했으니 아마 다음주부터는 내 팔자가 좋게 바뀌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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